48. 아비벨렉과 아브라함의 차이(창20:8-18)

관리자님 | 2021.12.11 23:03 | 조회 694

48. 아비벨렉과 아브라함의 차이(20:8-18)

 

8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 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9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10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11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2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3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14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15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16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14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15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16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아비멜렉은 꿈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한 것을 모든 종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을 책망합니다. 아비멜렉은 큰 죄로 인해 그와 그의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아비멜렉이 말하는 것을 보면, 아비벨렉은 하나님에 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비멜렉도 노아의 자손이기 때문에 노아의 자손으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하나님을 알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비벨렉은 아브라함이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알고 있었던 하나님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속에서 알았던 하나님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과 그 사이의 개별적 관계의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개별적 지식이 없는 사람은 그 지식으로 사는 자들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개별적 지식이 없는 자들은 그 자신의 육적인 생각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육적인 생각으로 살면, 그 자신이 개별적 지식을 가진 자의 환경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없는 자의 삶은 죽은 자들의 삶입니다. 죽은 자들의 삶은 산 자들의 삶의 환경이 됩니다. 아비멜렉은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아브라함의 삶의 환경이 된 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기도에 그의 삶의 축복과 저주가 달려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를 위해 기도하면, 축복을 받고, 기도하지 않으면 저주가 그대로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 삶의 중심이 아비멜렉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시대부터 사람들에게 개별적 지식의 하나님의 시대가 열립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런 개별적인 지식의 하나님이 함께하는 시대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이 개별적 하나님의 지식은 요셉을 통해 그 지식이 살아서 요셉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를 실감 나게 보여줍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미디안 상인에게 요셉을 팔았을 때 육적 관점에서는 요셉은 자신의 형들이 팔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지식이 그를 판 것입니다. 그를 통해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보내기 위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의 사람들은 일 차원적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이런 개별적 관계 속에서 지식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거쳐 요셉을 통해 그 지식이 요셉을 이끌어 갔습니다.

 

요셉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가게 했었던 하나님의 지식은 모세 때 와서 크게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동안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요셉에게만 감지되었던 그 지식의 하나님이 모세 시대에 와서는 애굽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드러났습니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의 하나님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이렇게 이스라엘의 모든 민족의 하나님으로 드러났지만, 역시 이스라엘 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의 하나님입니다. 모세에게 기록된 말씀을 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별적으로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개별적 교제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사람을 통해 드러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군중이나 무리를 통해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통해 드러나셨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기록된 말씀의 시대를 열었고, 이때부터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자들에게 개별적 하나님의 지식을 주시고, 그 지식을 통해 그를 이끌어가는 시대를 열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어떤 무리나 집단을 통해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의 개별적 지식을 지닌 한 사람을 통해 드러내십니다. 이 시대에도 개별적 지식의 말씀이 있는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십니다. 지식의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는 성령님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들어가심으로써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그 한 사람은 한 하나님의 주권을 가진 나라, 하나님의 나라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 한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을 가진 위대한 나라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정체성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한 사람은 하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늘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 말씀으로 운영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는 개별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운영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 개별적 말씀이 없는 나라는 죽은 것과 같은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환경이 된 것처럼 다른 하나님 나라의 환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존재물의 중심이 아니라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 지식의 말씀이 개별적으로 들어오면, 그 지식의 말씀이 그를 이끌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완전한 하나의 독립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누구도 그 나라를 침범하지 못하는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관심이 주어지는 그런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나라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나라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하나님 나라들의 모임입니다. 그런 나라는 그 사람이 그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식이 그를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담은 그릇인 사람은 하나님 지식이 살아있는 지식의 생명체가 됩니다.

 

하나님의 지식의 말씀을 담는 그릇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주권을 침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도 그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습니다. 성령님도 그를 존중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성령님의 뜻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따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는 무궁무진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한없이 많이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엄청나게 큰 나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크게 만들기도 하는 나라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누구로부터도 천대받아서는 안 됩니다. 존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나라이면, 그 외의 모든 존재물은 환경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중심이 되는 세계가 펼쳐집니다. 환경이 중심이 되는 세계는 없습니다. 환경에는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 간에는 서로 발을 씻기라고 합니다. 이는 서로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최고의 하늘이 될 수 있도록 도우라고 합니다. 서로를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성도들 간에는 결코 서로를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각 성도는 모두 하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판단이란 어떤 것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판단이란 다른 그리스도인을 나의 육적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본래의 그 사람, 즉 하나님의 그릇, 하나님의 나라를 그대로 보지 않고, 나의 육적 생각으로 환원시키는 것입니다. 환원시킨다는 것은 그 본래의 사람을 나의 육적 생각으로 바꿔버린다는 것입니다. 매우 무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8:15)”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도 서로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그 성령의 은사로 성도들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어떤 성도에 관하여 예언할 때 자신의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를 통해 나타난 예언을 위한 환상과 자신의 육체를 따라 하는 판단이 섞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제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감옥에 갇힐 것이라고 여러 예언자와 선지자들이 예언합니다. 성령을 통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옥에 갇힐 것이라는 예언을 성령을 통해 받았다면, 그냥 기도하면 됩니다.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옥에 갇힐 것이니 가지 말라는 것까지 말한다면, 육체를 따른 판단이 그곳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옥에 갇히는 것을 미리 성령의 감동으로 알았다면, 그냥 그것을 위해 기도하면 됩니다.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 옥에 갇힐 것이니 가지 말라고 바울에게 말한다면, 바울이라는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의 육체의 판단으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가 죽는다고 하자 그리마옵소서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막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14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15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16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선대 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을 감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개별적 하나님의 지식을 가진 자였습니다. 이 개별적 하나님의 지식이 아브라함의 삶을 이끌었습니다. 그 지식이 이끄는 삶이 아비멜렉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왕은 아브라함에게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선대 합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의 삶은 이 아브라함과 같이 지식이 이끌어가는 삶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아는 개별적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의 환경이 되어 아브라함에게 삶을 위한 토지를 공급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차입니다. 아브라함은 중심이며, 아비멜렉은 환경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환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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