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1. 하나님의 아들과 죽음의 비통함(요11:27-37)

관리자님 | 2020.03.29 09:29 | 조회 222

51. 하나님의 아들과 죽음의 비통함(11:27-37)

 

27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말씀을 하셨을 때 마르다의 대답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르다가 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곳 세례요한이 세례 주던 곳에 오기 전 솔로몬 행각에서 걷고 계실 때 유대인들과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과 나는 하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하므로 신성모독이라고 하면서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한복음1036절에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과 하나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과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나는 속성이 곧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본문 직전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속성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출됩니다. 아버지의 이름 예수는 구원의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을 의미하며,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은 승리의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을 의미하며, 여호와 라파의 이름은 치료의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이름은 예비하는 속성을 가진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그 외에도 여호와 삼마, 여호와 샬롬, 여호와 라아 등 여러 이름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이름의 속성은 곧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우리도 완벽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는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의 속성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으로 알려주시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정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이 죄로 물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로 계실 때에도 죄로 물들지 않았었습니다. 그 육이 완전히 순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님이 들어가셨을 때 하나님의 이름의 속성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제자인 육을 가진 우리는 그리스도와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이 죄로 오염되었었다는 것입니다. 그 죄로 오염된 육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면서 인제 하나님의 아들인 그 속사람을 그의 육 속에 담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두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이 로마서에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하는 것을 보는도다(7:28)” 그렇게 말하면서 바울이 고백하는 것은 이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건지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로 오염된 육으로부터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즉 로고스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 오염된 육체를 이기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오염된 자신의 육과의 싸움입니다. 그 싸움에서 이김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 즉 로고스의 말씀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영이 육의 생각을 이기는 훈련인 경건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알려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은, 로고스의 말씀이 곧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들어와 그 제자들이 부활이요 생명이 되는지 그 과정을 알려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바로 제자들이 부활이요 생명이 되는 그 과정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말씀을 깨닫고, 믿음이 생겨서 그의 혼과 육이 그 믿음을 선택할 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의 속성이 그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속성들, 치료, 승리, 예비, 평강 등의 속성이 인제 하나님의 아들들인 우리의 속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마르다는 집으로 가서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그를 부른다는 말을 전달합니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마을로 들어올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불러내는 것을 제자들이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찾은 것입니다.

 

31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그런데 마리아를 위로하러 왔었던 유대인들도 같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동안 마리아가 죽어가는 오라비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기다렸었는지를 알게 하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우리도 어떤 질병이나 문제가 생겼을 때 아무리 기다려도 그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되는데 이를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나올 것입니다. 마리아가 고백하는 말처럼, 주께서 여기 계셨다는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런 말처럼 우리도 말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 하나님은 사람들이 상상치도 못하는 방법의 해결책을 내시는 것을 봅니다. 완전히 다른 방식의 해결책을 냅니다. 그것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사로가 죽자,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 오라비가 죽어 완전히 포기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극적인 방법으로 그 해결책을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가져다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로의 죽음을 통한 영적 메시지를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전달하여야 하셨기 때문에 그와 같이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33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은 그가 우는 것과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자 와서 보시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흘리시는 눈물은 어떤 눈물입니까? 바로 죽음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능한 인간들의 속성 아니겠습니까? 인간들은 죽음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죽음에 대하여 대항할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망은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 앞에 연약한 사람들의 속성을 보고 우시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의 세력 앞에 숨도 쉬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우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죽은 나사로는 찾아오신 것은 죽음 앞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활과 생명이 무엇인지를 경험으로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더이상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말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마르다에게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으셨습니다. 인제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부활과 생명의 세계로 나오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36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시는 것을 보시고 유대인들은 얼마나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하였는가 하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피상적인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영적 세계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보는 자들입니다. 현상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것을 볼 때 그 이면의 영적 세계를 보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가르쳐주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현상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나사로는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는가 하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했으면 나사로의 병을 고쳐줄 수 있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사람은 나사로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은 그 생각하는 것이 짧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각 깊이는 육적 사람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이 참의 생각이며, 현상의 세계를 통치하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기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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