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4. 향유를 부은 여인과 나사로(요12:1-11)

관리자님 | 2020.03.29 09:31 | 조회 217

54. 향유를 부은 여인과 나사로(12:1-11)

 

1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복음서에서 향유를 부은 여인과 관련된 내용으로 중복된 것을 합하여 3번이 나옵니다. 이중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갈릴리 지역에서 향유를 부은 것과 유다 베다니에서 향유을 부은 것입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한 여러 설교와 학자들의 견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향유를 부은 것의 의미에 관심을 두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일단, 요한복음에서는 112절에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여인이라고 나옵니다. 이는 나사로가 죽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본문 12장에서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후 향유를 부은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이를 보면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께 두 번 향유를 부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향유를 부은 사건은 마리아가 두 번째 향유를 부은 사건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이후 예수께서 유월절 6일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114일 저녁에 지킵니다. 다음 날인 15일부 21일까지 7일간이 무교절입니다. 그러면 이날은 유월절 6일 전이기 때문에 19일이 됩니다. 이날 마리아는 그녀의 집인지 다른 사람이 집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께 두 번째 향유를 붓습니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이후, 유대 사회는 그의 부활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이 온통 예수 그리스도와 나사로에게 관심이 있었던 때 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나라를 회복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그러한 때 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베다니에서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을 때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즉 순전한 나드 한 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이에 가룟 유다는 이를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이렇게 허비하느냐고 책망합니다. 그의 세속적 마음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속적 마음을 가지고 따르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파는 자가 됩니다. 그녀가 한 일은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들과 같이 있겠지만 나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향유를 부은 사건에서 이 여인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과 관련된 많은 설교는 주로 이 여인이 그녀의 모든 것을 바친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녀는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사실상 그리스도께 드린 것입니다. 그녀의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향유를 부으면서 그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에게 그녀를 간만 두라고 하시면서 나의 장례 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향유를 붓는 행위를 당신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죽으실 것을 감지하고, 그리스도의 장례를 위해 향유를 부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살아날 것이라고 이야기는 하셨지만, 그것이 곧 몇 일 안에 일어날 일임을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장례를 위하여 산 사람에게 향유를 붓는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사람의 장례를 위해 향유를 부었다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은 것은 단순히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 그녀의 모든 것을 드리고 싶어서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그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허비하여도 아깝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변화시키는 그런 일을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큰 능력을 행하고, 많은 성취를 이루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냥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 비싼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그녀의 최고의 사랑 표현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였더니 그녀는 하나님이 하시는 구속사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죽으신 후 부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를 통해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인제 예수님이 다음으로 하실 일은 실제로 돌아가신 후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의 실행에 동참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향유를 부은 사건(26:6~13)에서는 그 여인이 한 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그녀가 행한 일이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한 가르침을 하나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진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은 스스로 성취하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실 때 대제사장 가야바와 가룟 유다와 같이 그 일에 동참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마리아와 같이 동참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십니다. 그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역사에 육체를 가진 자들이 동참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동참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항한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우상숭배에 몰입한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세상에 존재하였을 때에도 역시 하나님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속의 역사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계속 펼쳐지고 있습니다. 누가 그 구속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는자가 되겠습니까? 그 역사에 최고의 참여자가 바로 이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같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인이 행한 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육체를 입고 있는 자들은 육체의 차원에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있어서 항상 영적인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여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망, 사랑이 있는 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나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이 모든 민족을 모으고 심판하실 때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겠다고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양은 그 오른쪽에 염소는 그 왼쪽에 두겠다고 하십니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그 오른쪽에 분류된 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하시면서,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 입혀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의인들의 대답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그렇게 하였습니까하고 반문합니다. 이는 그들이 전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여기 있는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서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이 그 역사에 참여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곧 작은 소자를 돌아보는 자들이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소자를 돌아본다는 것은 그들의 삶입니다. 그들의 본능에서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구속의 역사에 참여하는 방법은 곧 그들의 삶으로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행위로 참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행위로 참여한다고 할 때 그것은 가식과 외식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바로 삶으로 드리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눈물 흘리면서 예배의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행위는 절에서도 하고, 어떤 종교에서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도는 바로 그들의 삶으로 예배하는 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예배가 될 때 그들은 비로소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바로 이 여인과 같은 자들이 세상에서 최고의 구속 역사에 참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는 것과 부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역사에 최고로 쓰임을 받았던 여인이 바로 향유를 부은 여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그 구속 역사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이 여인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종교적인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하고, 순수한 사랑입니다. 이 여인처럼 단번에 300데나리온의 향유를 허비하는 그러한 사랑입니다. 어떤 보상을 생각한 그것이 아니라 그냥 주님을 사랑하는 그것, 바로 그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9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베다니에서 향유를 부은 사건이 있을 때 유대인의 큰 무리가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알고 그곳에 몰려왔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만 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참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보기를 열망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온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와 나사로로 인해 떠덜썩거렸습니다. 나사로로 인해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는 인제 예전의 나사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증인으로 유대 지역에 우뚝 선 자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나사로만 보고도 예수를 믿게 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부활과 생명의 상징이 되는 자들은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보기만 해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나사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상징이 되었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에 동참한 자들이 된 자들입니다. 우리가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 된 자들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증언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이 현 우리들의 삶에서 경험이 되도록 합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을 입으면, 우리의 이웃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을 보게 됩니다. 성령충만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육체까지도 성령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말씀을 깨닫고, 기도를 통해 깨달은 그 말씀이 우리들의 육체에 스며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충만의 역사는 모여서 기도할 때 나타났습니다. 이 시대에도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고, 혼자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도 너무나도 필수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말씀을 따라가고자 하는 나를 육적인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는 힘을 가져다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요한, 야고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육체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육신의 연약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시험에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을 그것을 오늘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매일 습관처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인 세계에서 양식은 말씀이지만 경건의 훈련을 하는 그 힘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하여 깨닫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깨달은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달될 때 그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이면 그 말씀이 사람들의 심령으로 직통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들이 깨달은 말씀을 가지면, 그는 성령충만한 자가 되어 그의 말씀이 그리스도가 직접 말씀하는 것처럼 됩니다. 기도하는 자와 기도하지 않는 자의 차이는 영적 세계의 능력을 좌우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자가 말씀이 없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되어 영적 분별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는 말씀이요, 그다음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는 영적 세계에서는 언제나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는 자들은 세상에서 능력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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